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슬리 맥네어 (문단 편집) === 당시 [[대전차 자주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 ===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맥네어 준장과 앤드류 브루스 중령은 대전차 부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각 군종별로 상이한 요구가 나왔다는 것이다. 보병부대는 방어적 용도로, 기갑부대는 기동부대로, 포병은 중포로 운용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맥네어와 브루스는 나름대로의 교리 연구를 통해 대전차 부대는 "적대적 전차의 격멸"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교리를 세웠다. 그를 위해서 [[Tank destroyer|대전차 부대는 군단이나 군 사령부 직할의 독립 대대로 편성]]되어 사령관의 결단에 따라 적 전차부대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하여 대전차 자주포는 강력한 기동성을 갖춰야 했다. 위의 모의전 조작에서 보여지듯 맥네어도 처음에는 대전차 자주포 지지자였다. 그래서 나온 게 [[M3 하프트랙]]에 프랑스제 75mm 야포를 얹은 초기형 대전차 자주포인 M3 GMC와 M6 닷지 트럭에 [[M3 37mm 대전차포]]를 얹은 M6 파고였다. 이후 1942년 9월 본격적으로 [[M10 GMC]]가 양산되기 시작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미군의 졸전으로 유명한 카세린 협로 전투에서 제2군단장 로이드 프레덴덜 소장은 위와 같은 대전차 자주포 운용 교리를 전혀 지키지 않고 대전차 자주포 대대들을 중대 단위로 쪼개어 분산하여 매복시켜 버렸다. 이에 노련한 독일군 지휘관들은 대전차 자주포의 사거리 밖에서 관측경으로 매복한 대전차 자주포들을 발견하면 포격 지원을 요청했고, 장갑이 빈약한 M3 하프트랙이나 장갑이 아예 없는 M6 닷지 트럭을 바탕으로 제작한 초기형 대전차 자주포들인 M3 GMC와 M6 파고로 무장한 대전차 자주포 대대들은 큰 피해를 입고 만다. 게다가 미국의 대전차 자주포로는 공격적으로 나서기도 무리였다. 회전포탑이 달려서 독일의 비슷한 차량보다는 전술적 유연성이 좋았지만, 종이장갑과 상부가 개방된 [[포탑]]은 사실상 매복작전 외에는 해당 차량을 사용하기 힘들게 하는 주 원인으로 작용했다. 독일의 구축전차의 경우 기동성을 포기한 대신 장갑이 두터운 편이어서 매복에 실패한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버틸 수가 있었다. 다만 이것도 3호 돌격포 이상의 물건 한정이고 마르더 시리즈 같은 물건은 걸리면 삭제당하는 것은 동일하다. 그 후 전투 평가를 통해 대전차 자주포의 한계를 느낀 것은 맥네어 뿐만이 아니라서, 이탈리아 전역의 제6군단장 존 포터 루카스 소장은 대전차 자주포는 공세적 병기로 실패작이니 퇴출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고 [[오마 브래들리]]도 이에 동의했으며 [[조지 S. 패튼]]까지 대전차 자주포에 불만을 표한데다 본래 전차는 전차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전차 신봉자 제이콥 데버스 장군[* 제6[[집단군사령관]]으로, 서열이 그 패튼보다 높고 브래들리와 동격인 유럽전선의 최고위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 양반의 병과는 [[기갑]]이 아니라 [[포병]]이었다. 포병 장교가 봐도 대전차 자주포는 영 아니었다는 것이다.]은 대전차 자주포를 전차와 견인식 대전차포 조합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견인식 대전차포의 재도입은 맥네어 혼자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부분은 맞는 주장이기도 하다. 위에서 독일군의 8,8cm FlaK이나 영국의 17파운더급의 물건을 주지는 못할망정 견인식 M5 anti tank gun을 줬다는 지적은, 애시당초 그들과는 체급이 다르기 때문에 부당한 지적이다. 독일군과 영국군, 소련군도 보병부대의 주력 대전차포는 [[PaK 38|5,0cm]], [[6파운더|57mm]], [[76mm ZiS-3 사단포|76.2mm]] 정도로 이들에 비해 3인치 포는 한 체급 높은 무기였고 그만큼 강력했다. 88mm나 17파운더같은 중대전차포는 그 크기와 무게덕분에 인력운용을 확실히 초과하여 사단 급 큰 규모의 부대에 보급해야했기 때문에 소부대에 지급하는 용도로는 [[PaK 40]]와 비교해야 하는데, Pak 40과 견인식 M5 대전차포는 인력운용을 살짝 초과하는 체급으로 유사하며 당시의 중형전차를 정면에서 파괴하기에는 PaK 40미만 체급은 관통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소련군은 강력한 야포지원을 받는다고 서술했는데, '포병은 전장의 신이다'로 대표되는 널리 퍼진 이미지와는 달리 소련군 사단포병 화력은 상당히 부실했다.[* 이는 전쟁 초반 소련군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이 과정에서 소련 포병의 인적, 물적 피해 또한 극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족한 포병 전력을 그나마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사단포병을 감축하는 대신 군단포병으로 배속하였다. 숙련된 장교가 부족하여 주요 참전국중 유일하게 ToT 포격이 불가능했으며 정찰, 연락 자산이 매우 부실하여 공세시에 적재적소에 화력을 지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공격 전에 미리 포격 스케쥴을 수립하고 현장에서 필요한 화력은 76.2mm 사단포를 포병이 직접 끌고다니며 자급하도록 하였다. 이는 독일군이 진형을 변경하였거나 예상 외의 요소로 작전 스케줄이 틀어지면 전체 작전이 틀어지게 되며 직접 76.2mm 포를 끌고다니던 포병의 사상자를 보병 못지않게 낳게 되었다.]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전략적 승리를 달성하여도 도리어 큰 사상자를 내던 주요 원인은 항공, 포병 지원세력의 부실함이었다. 오히려 화력덕후는 미군이었는데, 미군 사단은 어느 군대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포병전력을 보유했으며 포병부대는 전차부대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분쇄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위에서 예로 든 참패인 카세린 협곡 전투에서도 전차를 앞세운 독일군의 역공을 압도적인 포병화력으로 갈아버렸다.(참고로 2차대전기 전차를 잡은 1위가 야포, 2위가 전차, 3위가 항공폭격이다) 또한 미국식 대전차자주포 개념의 탄생 배경도 고려해봐야 한다. 대전 초기 폴란드와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군의 대규모 전차 집중 운용에 보병들은 전차에게 무력함만을 보여주며 [[전격전]] 신화의 희생양이 된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각국은 그에 대응하는 전략을 수립했으며, 미군은 집중된 전차 앞에서 보병은 무력하며, 기동화된 대전차병기로만 상대할 수 있다고 보고, 적 전차에게서 보병은 몸을 숨기고 보전하며 집중된 전차 전력의 돌파 시도를 기동화된 대전차부대의 집중 반격으로 맞서는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뒤이어 동부전선이 열리고 소련군 보병부대는 전차부대에 무력히 당해 독일군의 포위섬멸에 몇번이고 재앙적인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대전차총, 대전차포, 대전차 장애물, 대전차 지뢰, 대전차 수류탄 등 보병의 대전차 역량은 날이 다르게 강화되었고, 독일군에게 전처럼 전차만으로 보병을 짓밟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하였으며, 그에 따라 독일군도 보전협동을 중시하여 대규모 전차 집중 운용보다 보병과 함께 분산 운용하도록 바뀌었고, 소련군 보병부대가 구축한 깊은 종심을 가진 겹겹의 대전차 방어선은 대전 초기와 같은 포위섬멸 시도를 번번히 저지했다. 이러한 전훈을 받아들인 미군은 다시 보병의 적극적인 대전차 전투를 강조했고, 그를 뒷받침할 견인식 대전차포와 바주카, 총류탄 등의 보병 대전차화기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반면 대전차 자주포는 독일군의 전차집단을 상대하려 만들었으나 독일군이 전차집단을 안굴리게 되었으므로 존재 의의를 의심받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막대한 전비부담으로 인한 국방부의 압력을 수시로 받고 있던 맥네어로선 일선 야전 지휘관들부터 싫어하고 전차와 비교해 가격도 큰 차이 없는[* M10 울버린의 가격이 40,906달러인데 M4A4 셔먼의 가격은 46,467달러에 불과했다.] 대전차 자주포 배치를 줄이고 견인식 대전차포를 재도입하는게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상식적으로 육군 고위 장성 다수와 국방부가 다 같이 입을 모으는데 그걸 어떻게 무시하란 말인가? 또한 비난 항목에서 견인식 대전차포의 운용 인원이 대전차 자주포의 2배라고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사람만 있다고 무기가 준비되는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인력이 있어도 장비가 없어 싸울수 없는것이 더욱 현실적인 문제다. 고가의 대전차 자주포 1대를 생산할 비용이면 견인식 대전차포는 몇문은 족히 생산할 수 있다. 당장 독일군이 산업력도 자원도 인력도 부족하지 않았지만 중구난방한 생산체계로 만성적인 장비부족에 시달리며 노획품까지 닥닥 긁어모아 정식 명칭까지 붙여가면서 대전 내내 운용했으며, 소련군의 경우 기존 보병부대의 대전차 전력 부족의 중요성을 통감하여 대폭 증강한 대전 후기에도 소련군 보병사단의 대전차포 편제수량이 미군 보병연대 대전차포 편제수량과 비슷한 수준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